국신당과 수동별신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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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안동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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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신당은 600여 년 전 세워진 것으로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공민왕이 난적을 피해 이 지방까지 피난을 왔을 때 공민왕은 쫓기는 형편이어서 자기를 추종하는 부하가 한 두 사람씩 줄게 되었으며 풍산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5, 6명에 지나지 않았다. 다급한 공민왕은 풍산 동쪽 상리동 산 정상에 허수아비 병정을 곳곳에 세우고 남으로 피신을 하였다 한다. 마침 이때가 가을철 아침이라 안개가 끼어 공민왕을 쫓던 군사가 산위를 보자 한눈에 집어 삼키려는 기세로 많은 군사가 밑을 보고 활을 쏘는 형용을 하기에 겁에 질린 적군은 후퇴하였다 한다. 공민왕은 이곳 무성한 대나무 숲에서 휴식을 취하여 무사했었다 하며 이것을 기려 마을사람들은 국신당을 세워 공민왕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이 국신사 사당에서 고사를 지내면 많은 효험을 내었다고 한다. 제를 지내기 며칠 전에는 사당을 깨끗이 치우고 온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자 이도 차츰 그만두게 되었다.
조선 중엽에 이 마을에 권사도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말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그 무술이 천하일품이었다. 어느 날 이 수동 마을에 어디선가 종일 하늘을 울리는 용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불안과 공포에 떨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때 사도 청년이 용마를 달래보겠다고 나섰다. 사도는 말을 타고 마을을 달려 나가 낙동강 어귀 깊은 웅덩이 옆 큰 바위위에서 울고 있는 용마에게 다가갔다.
신통하게 용마는 사도가 가까이 오자 울음을 그쳤다. 사도는 용마를 타고 위풍당당히 마을에 나타났다. 사도는 용마를 길들이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몇 년 뒤 왜란이 크게 일어나 사도는 용마를 타고 출전하였다. 마을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용마에 올라탄 사도는 자못 기개가 넘치고 용마도 우렁찬 울음을 길게 내질렀다. 마을을 나가려는데 국신사 앞에서 말의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변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뜻밖의 변고에 술렁거렸다. 그러자 권사도는 말에서 내려 "이는 국신사를 돌보지 않아 신주가 노하신 것입니다." 하며 국신사로 들어가 지성을 다하여 열심히 빌었다. 그러자 발이 떨어져 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사도는 떠나면서 국신사 사당에 지성을 드릴 것을 마을사람들에게 당부하였으며 훗일 큰 전공을 세워 병마절도사의 자리에 올랐다 한다.
마을에서는 국신사 사당을 재건하여 정월 대보름날에는 수동마을사람들 뿐 아니라 인근 5개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사당 앞에서 굿을 벌리게 되었는데 이 굿을 수동별신굿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400여 년 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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