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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목 배씨댁 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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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안동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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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 400여 년 전 안동군 월곡면 도목동은 무릉도원경 같이 산수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이곳에 이황의 제자로 학문이 높은 배삼익이 살고 있었다. 배삼익은 학문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꾸준히 정진하며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 분명 자신만만하게 응시를 했는데 그만 낙방하고 말았다. 배삼익은 고향으로 돌아와 낙심천만하여 두문불출 일체의 방문객을 끊고 시름에 잠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마을에 한양 손님의 찾아 내려왔다. 방문객은 배지개 배지개 하며 누구를 찾는 듯했다.
 

배삼익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사람을 청해 들이니 그는, "이 고을에 사는 배지개라는 사람이 진사 시험에 등과를 했는데 도무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하였다. 이 고을에서 과거를 본 사람은 자신뿐인 것을 아는 배삼익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러면 혹 그 글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하니 손님은, "물론이지요. 하도 흘려 써서 사실은 저 같은 사람은 잘 읽지도 못하겠습니다마는…" 손님이 내미는 글을 보니 바로 과거 시험에 자신이 냈던 글이 아닌가, 이름은 너무 흘려 써서 삼익(三益) 꼭 지개(之蓋)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등과를 하게 된 배삼익은 선조 21년에 황해도 관찰사와 병마수군 절도사로 임명되어 황해도에 부임했다.
 

서해안에 8, 9년간의 심한 가뭄이 들어 기근이 날로 심해지자 황해도민의 민심을 파악하고 구휼을 하라는 어명을 받들고 부임한 그는 고을을 살펴보고 그 참상에 매우 놀랐다. 많은 부하를 풀어 그 지방의 어려움을 샅샅이 보고토록 했다.
 

해주에는 버린 아이들이 뼈가 앙상하여 그냥 돌아다니며 울고 있으며 아녀자들은 남편이 도망가고 굶주림에 지쳐 통곡들을 하며 길바닥에 너부러져 있었고 재령 등지에는 오히려 걸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이는 아사하는 까닭이며 기타 지방에서는 살인자가 많은데 이는 사람을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배삼익은 양곡을 모두 풀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며 구황식물을 적극 재배케 하는 등 주야로 고민하여 민생구제에 온 힘을 다하였다. 곡식 종자도 없고 나라의 부역과 세금은 그대로 상납해야 하는 어려움을 괴로워하던 중 옥문을 모두 열고 모든 죄인을 방면하며 그들을 부역에 써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자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드디어 그는 병이 나서 농토를 살펴보러 나갔다가 졸도하고 말았다. 나라에서는 환조하라는 어명을 내려 특별히 사인교를 보내 주었다. 병이 들어 운신을 못하여 사인교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1588년 7월 해주 청단역에서 55세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임금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상여를 하사하였다. 그 상여에 시신을 싣고 관군에 의해 봉화면 사평리에 운구를 모셨다.
그후 그 상여와 사인교는 배씨 종택에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며 배씨 종가는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어 안동군 임하면 송천동으로 다시 옮겨져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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