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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의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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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른 가을 날 오후 퇴계태실을 찾아 나섰다. 햇살은 한여름 뙤악볕처럼 따갑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높아진 맑은 하늘만큼이나 산뜻하다.
알려진 만큼이나 퇴계태실로 가는 길은 자가용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고 주차 공간도 없었다. 들어서는 경운기를 피해 한참을 기다려서 퇴계퇴실까지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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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에 「큰 현인을 내리고 선녀가 산실을 정해 주었다(降大賢仙女定産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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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외조부는 살림이 요족하고 후덕해서 고을 사람들이 영남 부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엄동설한의 어느 날 문둥병에 걸린 한 여인이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간청하였다. 온 집안 식솔들이 질겁했으나 퇴계 외조부는 자신의 방에 데려와 윗목에 자도록 허락했다. 여인은 아랫목까지 다가와 노인의 이불 속에 발을 넣기는 했는데 그때마다 노인은 여인의 발을 밀쳐 내었다.
이튿날 여인은 인사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며칠씩 건너 와서는 재워 달라고 했다. 그래서 온 집안에 소동이 일어났으나 노인은 전과 같이 대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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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그 여인이 선녀로 변해서 노인을 시험했다고 말하며 둘이 전생의 인연이 있으니 부부인연을 맺자고 하고는 그날부터 노인과 동거했다. 열흘이 지나자 헤어질 기한이 되었다고 하면서 안뜰에 산실을 지어서 동성 산부를 거기에서 해산토록 하라고 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노인은 그 말대로 만삭의 딸을 거기에 들여보내 해산케 했는데 거기에서 태어난 분이 퇴계라고 한다.
                                                  (출처 : 안동의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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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퇴계선생을 존경해서 신성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말기에 만들어 진 창작설화라고 할 수 있다.

실제 퇴계태실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0호 지정되어 있으며,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위치해 있다.
이 집은 퇴계 이황(李滉,1501~1530)의 조부 이계양(李繼陽)이 조선 단종(端宗) 2년(1454)에 지었다. 후에 퇴계가 1501년 11월에 이 집에서 태어났다하여 ‘퇴계태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본체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자 형이다. 본채의 중앙에 삼면(三面)을 계자난간(鷄子欄干)으로 둘러 누(樓)형식으로 독특하게 꾸민 것이 퇴계태실이다.
동남쪽 모서리에 마루를 두어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이 분리되어 있는데, 마루 위쪽에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본 채 동쪽에는 ‘―’자형 건물인 노송정(老松亭)이 자리하고 있고 그 우측에 사랑이 있다. 대문은 성림문(聖臨門)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약 60여 년 전에 고쳐지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특히 태실과 같은 독특한 방식은 상류주택을 일면을 볼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집 전체를 일명 노송정 종택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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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퇴계태실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이 처럼 아름다운 고가에 사람의 온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대부분 고가들이 이 건물처럼 사람이 살 지 않는 빈 집으로 남아있겠지만 집은 사람이 살아야만 그 존재가치가 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건물은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는 문화재 보존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용하고 가꾸어가는데 있어서 무능하고 무지하다.
문화재 보존만이 능사가 아니다. 특히 아름다운 한옥은 그 유용가치를 찾아서 이용하고 가꾸어가야만 더 오래 유지되고 본존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퇴계태실은 그런 면에서 우리가 좀 더 생각하고 그 유용한 가치를 찾아야 되지 않을까.
사람의 온기가 없어 건물도 힘없이 버티고 있는 것 같아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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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유경희님의 댓글

  • 유경희
  • 작성일
동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죠